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석유화학경기가 급전직하하고 있다. 가격이 반토막도 아닌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데다 제품 판매마저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기업의 수익 확보에 비상이 걸림과 동시에 업계는 패닉상태에 빠졌다. 과거에도 항상 불황은 있었지만 이번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 업계의 고민은 더 한 상황이다.
과거 석유화학업계가 겪었던 불황은 수요보다는 수급상의 문제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감산을 통해 공급을 줄이거나 일부 설비에서 트러블이 발생해 공장이 가동중단 됐을 경우 석화경기는 회복국면을 보였다. 즉 공급의 과잉과 부족이 반복되는 패턴을 보인 셈이다.
하지만 현재 불황은 수요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석유화학 시황을 좌우하던 수급 밸런스가 수요 부재로 무너진 것이다.
현재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해 기초 원료인 나프타와 석유화학제품 모두 급락세를 보이면서 바이어들은 구매를 주저하고 있다. 가격이 계속 떨어질 경우 석화기업 수익은 마이너스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최근 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상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대응책과 향후 해결해 나가야할 과제를 짚어봤다.
[편집자 주]
■ 나프타 가격 폭락…유화업계 잇단 감산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끝없는 추락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유화업계가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가동률을 낮추는 등 국내 석유화학 산업 전체가 몸살을 앓으며 대책마련에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원유에서 정제한 투명한 액체인 나프타는 합성섬유나 필름, 잉크, 화장품, 타이어, 볼펜 등의 기초 재료일 뿐 아니라 휘발유도 보통 원유에서 바로 정제하지 않고 나프타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한편에서는 경기를 보여주는 지표와 같은 성격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나프타 수요·가격은 현대생활과 직결됨은 물론 경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 에너지정보제공업체 플래츠(Platts)에 따르면 지난 7월 톤당 평균 1,156.8달러에 달했던 국제 나프타가격은 11월 중순에는 279.5달러까지 4분의 1수준으로 곤두박질 쳤다.
이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국제유가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지난여름 베이징올림픽 이후 중국의 나프타 수요가 줄어들고 일부 정유업체에서 저가 나프타를 출현하면서 가격 하락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석유화학제품인 합성수지(HDPE)도 지난 7월 톤당 평균 1,818달러에서 11월에 785달러로 떨어졌고 폴리프로필렌(PP)도 같은 기간 톤당 2,012달러에서 765달러까지 하락했다. 화학섬유 기초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역시 지난 7월 톤당 1,608달러에서 11월 최근 585달러까지 떨어졌다.
업계에서는 나프타의 톤당 재고차손(보유 중인 원자재 등 가격이 취득 원가를 밑돌아 발생하는 것으로 재고를 처분하기 전까지는 장부상 손실로 반영)이 700∼800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원료가격에도 못 미치는 제품가격으로 공장을 가동할수록 손해가 나는 실정이다.
이같은 나프타와 주요 석유화학제품의 가격하락으로 인해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고 있는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은 결국 공장가동 중지와 감산이란 카드를 꺼내 들며 수급조절에 나섰다.
우선 국내 최대 나프타분해시설(NCC) 업체인 여천NCC가 지난 10월 19일부터 연산 40만t 규모 제 3공장 가동을 중단한 것을 비롯해 최근 전남 여수산업단지내 3개 공장은 70%선까지 생산량을 줄였다. 금호석유화학은 지난달 중순부터 울산과 여수공장의 가동률을 70%로 떨어뜨려 감산에 나섰다.
이에 앞서 SK에너지도 10월말부터 울산 콤플렉스내 NCC 1공장 가동을 멈췄으며 태광산업도 11월초 아크릴 섬유원료를 생산하는 울산 3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한화석유화학은 11월부터 여수산업단지내 6개 공장 중 2개씩 번갈아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 삼성토탈, LG화학, 호남석유화학 역시 가동률을 10∼30% 줄였다.
이같은 NCC업체들의 공장가동 중단과 감산은 그동안 증산에 따른 재고 부담도 크게 작용했다. 불경기로 합성고무나 섬유 등이 안 팔리자 중간재인 에틸렌과 벤젠 등의 수요도 감소해 이들을 만드는 석유화학업체의 타격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나프타 재고로 이어져 유화업계가 도미노처럼 불황에 빠지고 있다. 유화업체들은 시장수요에 대비해 전에 비싸게 사둔 재고 부담도 안고 있다.
국내 수요도 줄었지만 해외 수출도 급감해 팔 데가 없는 형편이다.
특히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유화제품의 주요 소비처이면서 나프타를 사서 제품을 생산하는 기지인 중국의 수요 감소로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경기침체가 길어지는 가운데 증산에 나선 중국·중동업체까지 가세하면 시장 왜곡은 크게 심화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이같은 석유화학의 침체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며 전문가들은 2011년 말 경이나 돼야 다시 상승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란 예측을 하고 있다.
■ 中, 중동 등 유화업계 증설 완료…한국은 발등의 불 꺼야
최근 유화업계에 따르면 사우디 에틸렌·폴리에틸렌 컴퍼니(SEPC)가 알 주베일에 건설중인 에틸렌 크래커(연산 100만t)와 HDPE(연산 40만t) 설비가 지난달 가동에 들어갔으며 쿠웨이트의 이퀘이트 페트로케미칼도 연산 85만t 규모의 올레핀 II 크래커를 가동한다.
이미 올해 들어 중동 등에서의 신증설 공장에서 나오는 물량으로 국내 에틸렌과 같은 유화제품의 가격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라 앞으로 추가적인 가격 하락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내년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중국과 중동에서 지연됐던 프로젝트들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때문이다. 중국 석유화학 메이저 업체인 시노펙은 푸젠석화 및 사우디 아람코와 합작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내년 1분기에 완공하는 것을 비롯 총 생산능력이 연산 300만t에 달하는 프로젝트를 완료한다.
사우디 얀부 내셔널 페트로케미칼은 올해 2분기 가동을 목표로 했던 연산 130만t 규모의 크래커를 내년 1분기에 가동한다. 사우디 이스턴페트로케미칼은 지난 3분기에 가동하려던 연산 130만t의 크래커와 폴리에틸렌 설비를 내년에 가동할 예정이다.
이같은 중국과 중동지역의 신증설 공장은 국내 유화업계 뿐만 아니라 세계 유화업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 액체탄산 공급부족 심화…조선사 선박건조 난항
이같은 유화업계의 위기로 인해 EG(에틸렌글리콜)·EO(에틸렌옥사이드) 및 나프타 분해공정을 통해 생산되는 원료탄산의 공급량이 크게 줄어들며 산업용가스 업계에도 ‘탄산 파동’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이같은 탄산파동은 국내 조선경기 후퇴와 더불어 선박건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 탄산제조업체들의 액체탄산 생산량은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하루 2천t에 달했으나 지난달 들어 1천4백t 정도로 크게 감소했다.
최근 산업용가스업체에 따르면 10월 중순부터 경남도에 모여 있는 10여개 조선소에서는 월 사용량(6천9백40t)의 16%(1천1백t) 가량이 부족해 용접작업이 중단될 정도로 선박건조 공정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매월 2백50~5백t의 탄산을 사용하는 중소형 조선소들은 60~1백50t가량 공급을 받지 못해 부분조업과 일시 조업중단에 들어간 곳까지 있으며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은 대형조선업체들도 평상시에는 충분한 여유량을 저장해놓고 사용해 왔으나 최근에는 당일치밖에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이에 따라 얼마전까지만해도 kg당 150~180원이었던 액화탄산 가격도 최근에는 수요처 도착도 가격이 250~300원 이상으로 대폭 인상된 상황이다.
이같은 현상이 장기화될 전망을 보이면서 일부 중소형 조선소들의 경우 수주 받은 선박이나 선박블록의 납기를 맞추지 못해 대규모 위약금을 지불해야 할 상황까지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소형조선협회측은 액체탄산 파동이 장기화할 경우 중소형 조선소들의 조업손실이 하루 최대 1억7천만달러(약 2천5백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중소형조선협회는 지난달 지식경제부에 적정한 탄산 공급이 이뤄져 선박건조에 차질이 없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현재 중소형 조선업체 종사자들은 “탄산부족 현상으로 인해 생산현장에서는 정해진 납기에 배를 인도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며 정부차원에서 신속한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공장 가동률 서서히 회복세…비싼 나프타 연말경 소진 전망
하지만 이같은 악재와 어려움 속에서 최근 공장 가동률을 낮추며 공급을 조절한 유화업계는 제품 가격이 서서히 오르는 등 다소나마 숨통이 트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