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와 구리를 비롯해 금, 은, 설탕, 밀가루 등에 이르기까지 주요 국제 원자재 가격이 죄다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새해 벽두부터 우리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국제유가는 올해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한 상황이며 2007~2008년의 ‘원자재 대란’'이 재연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는 세계 경기 회복으로 수요가 회복된 데다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현금)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은 우리 기업의 수출 가격은 물론 소비자 물가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한국 경제에 ‘원자재발(發) 인플레이션’은 올 한해 뜨거운 이슈로 부각될 전망이다.
치솟는 유가, 당분간 지속
지난 2일 한국석유공사와 관련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미국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된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선물가격이 장중 한때 배럴당 92.06달러를 기록하며 2년3개월 만에 최고치를 나타냈다. WTI 선물은 전날보다 1.54달러 오른 91.39달러로 마감하며 배럴당 100달러 시대를 예고했다.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이날 배럴당 88.80달러를 기록했다.
두바이유는 지난 한 해 동안 26% 올랐다.
현재 정부는 국제유가 급등에 따라 ‘관심’ 경보를 발령하고 본격적인 대응태세에 돌입하고 있지만 치솟는 유가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특히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휘발유와 경유, 액화석유가스(LPG) 가격도 덩달아 뛰고 있다. 서울지역 일부 주유소 휘발유 가격은 ℓ당 2,100원을 넘었다. 국내 LPG 가격은 새해 첫 달 전례없는 22%의 기록적인 인상률을 보이며 서민경제 부담요인으로 등장했다.
겨울을 맞아 나프타의 원료 중 하나인 액화석유가스(LPG)에 대한 수요가 증가로 인해 나프타 가격도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유가 급등은 세계 경기 회복과 원유 재고 부족,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늘어난 달러 자금이 상품 시장으로 쏠린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생산 동결 방침을 고수하는 것도 요인으로 꼽힌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실장은 “북반구에 몰아닥친 한파와 경기회복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석유시장의 넘치는 자금으로 유가가 과도하게 치솟고 있다”며 “현재 미국이 풀어 놓은 돈이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원유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시장이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는 한 유가 상승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한편 올해 평균 유가는 작년(배럴당 78달러)보다 높을 것이 확실시된다. 영국의 세계에너지연구센터(CGES),미국 케임브리지에너지연구소(CERA),미국 에너지정보청(EIA) 등은 올해 평균 유가를 배럴당 82~88달러 선으로 예상했다. 우리 정부도 85달러를 제시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유가 100달러 시대’가 열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골드만삭스는 국제 유가가 향후 6개월 내 배럴당 100달러, 1년 내 배럴당 105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수급 요인 외 투기성 자금 영향
금·원유·구리를 비롯한 19개 주요 품목의 원자재 시세를 나타내는 CRB 지수는 지난달 31일 332.80으로 마감해 2008년 10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CRB 지수는 지난 한 해 동안 17% 올랐다. 같은 기간 면화는 92%, 은 84%, 옥수수는 52% 올랐다. 공산품의 주된 원료인 구리값도 같은 기간 35% 올랐다. 구리 3개월물 가격은 지난달 말 뉴욕상업거래소에서 파운드당 4.3625달러로 마감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같은 원자재 가격 상승과 관련해 경제 전문가들은 지난해 9월 미국의 완화 조치 이후 6,000억달러의 자금이 풀리면서 이 돈이 원자재 시장으로 대거 몰린 데다 중국의 소비증가, 곡물 생산지의 작황 부진이 겹쳐졌고 유로존 재정위기로 인한 글로벌 유동성 확대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 공급 부족이 맞물린 탓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은 원자재 값 강세가 수급 요인 외에 투기성 자금의 영향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2009년 초부터 원자재 시장으로 유입된 투자자금은 1,212억달러에 이른다.
헤지펀드 연기금 뮤추얼펀드 등이 원자재 투자를 늘리고 있다. 그러나 상품 가격이 지속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이 긴축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 신중론의 배경이다. 즉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면 상품 가격 오름세도 꺾일 수 있다는 논리로 볼 수 있다.
수출기업 41% ‘원자재값 상승 우려’
당장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수출기업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무역협회가 900여개 무역업체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 업체 41%가 올해 최대 위협요인으로 원자재 가격 상승을 꼽았다.
조사결과, 올해 우리 수출의 가장 큰 기회 및 위협 요인으로는 ‘경쟁국보다 우위에 있는 제품 경쟁력(41.9%)’, ‘신흥경제권의 성장세 지속(28.8%)’이 꼽혔으며 가장 우려되는 위협 요인으로는 ‘원자재 가격 상승(41.3%)’, ‘원·달러 환율 하락 및 변동성 확대(30.8%)’ 순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수출업계는 올해 3대 수출 키워드로 △파이가 커지는 신흥개도국 내수시장 선점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제품 경쟁력 제고 △채산성 악화에 따른 실속 없는 수출 방지를 꼽았다.
특히 수출기업 입장에서 수출물량이 확대되더라도 원자재 가격 상승과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채산성이 악화될 경우 수출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수출채산성 악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무협은 "수출채산성 악화에 대비하기 위해 업계 차원에서는 환변동 보험 또는 선물환을 활용하고 원자재 선확보 등을 통해 이익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는 환관리 서비스 지원을 확대하는 한편 안정적인 원자재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함께 설문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이 내년도 수출이 5%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출가격보다는 물량 확대가 올해 수출 증가세를 견인할 것으로 예상했다.
품목별로는 주요 품목 모두 수출이 증가할 전망이며 특히 컴퓨터 및 기계류 수출이 큰 호조세를 보일 것으로 분석됐다.
‘원자재발(發) 인플레’ 우려
원자재발(發) 인플레로 국내 물가관리와 경제운용에도 당장 초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올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3%로 예상하고 있지만 원자재 가격이 계속 뛰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은행이 작년 12월 발표한 11월 수입물가가 단적인 예다. 원자재와 중간재 가격이 오르면서 수입물가 상승률은 6개월 만의 최고인 8.2%(전년 동월 대비)에 달했다. 수입물가 상승은 시차를 두고 소비자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
유가가 계속 오르면 경상수지도 악화된다. 유가가 배럴당 1달러만 올라도 경상수지가 8억달러씩 줄어든다.
이같은 상황과 관련해 업체별로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특히 자금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들은 원자재 구입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납품단가를 제때 인상하지 못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우선 재고 물량을 넉넉히 확보한 업체들은 이번 원자재 가격 급등이 호재로 작용하지만 원가 상승부담을 상쇄할 방법이 없는 대다수 기업들은 수익성 악화가 예상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원자재 가격 인상에 따른 원가 압박은 업체들의 제품 가격 인상여부에 절대적이기 때문에 업체들의 한숨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재고 비축을 하지 못한 한 업체 관계자는 “최근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있지만 재고를 비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원가압박에 시달린다”며 “그렇다고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감안하면 제품가격을 당장 올리기는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